2023.06.16 ~ 2023.07.02

염기남 : 지나간 빛들의 에필로그

#지나간빛들의에필로그#painting#페인팅#염기남작가#yeomginam#개인전#갤러리인hq

  • 작가

    염기남

  • 전시장소

    갤러리인

  • 휴관일

    월요일/화요일

  • 문의

    01090172016

  • 주소

    서대문구 홍제천로 116 201호

전시소개/

…에 더하여, 회화가 사랑을 이야기한다면

콘노 유키


설령 휴대전화 카메라로 달의 표면까지 아름답게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멀리 있는 상대를 그리워한다. 그런 마음은 시각의 확장보다 촉각이 강화된 시각성의 확장이라 할 수 있다. 더 닿기를 바라는 마음은 눈에 비치는 것에서 시작되어 터치스크린의 소통 수단, 그리고 실제로 피부가 닿는 것까지 아우른다. 닿는 것—직접적인 접촉과 간접적인 접촉이 동시에, 그리고 교차하듯이 이뤄진다. 창문 너머 애틋한 마음을 보내고, 휴대폰 화면에 직-간접적인 접촉이 시작하고, 사람을 실제로 만나 그 온기와 숨결을 함께 공유한다. 창문과 화면과 피부는 다른 곳과 이곳을, 내가 아닌 존재와 내가 마주하는 접촉면이다. 


염기남의 회화 작업이 사랑과도 같다면, 그것은 오늘날 일상적으로 보는 화면과 이 화면상에서 이뤄지는 직간접적 접촉이 멀리, 그러나 이곳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개인전 《지나간 빛들의 에필로그》는 회화 작업을 사랑에 비춰보는 기회를 마련한다. 작품 제목으로 실제로 등장하기도 하는 ‘사랑’이란 말 그대로 ‘비춰보는 것’이다. 빛은 캔버스 화면에 물감이 뿜어내는 것이며 동시에 어딘가/무언가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 그것은 곧 출발점이자 동시에 선이 되어 종점이 된다. ‘초점 맞추기’와 ‘몸짓’으로 설명되는 두 전시 공간에서 ‘사랑’이라는 키워드가 공명하는 이유가 있다면, 사랑 또한 출발점과 종착점을 잇는 시작이자 과정, 그리고 결과이기 때문이다. 염기남의 회화에서 그린다는 표현보다 그어진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이유가 있다면, 실제로 그가 선(line)을 중심적으로 다루면서—그러면서도 캔버스 화면과 선이라는 중심에서 멀어지는 효과를 광선처럼 그어 표현하기 때문이다. 회화를 보면 하얀색 배경에서 서서히 후퇴하는 듯한 표현을 표면 위에 쌓아 올린 것을 볼 수 있다. 이 효과는 점차 화면 전체로 뻗어나가기 시작하는데, 빛으로 만든 깊이는 오히려 하얀 색의 면을 빈 면 대신 빈 공간으로 다뤄짐으로써 공간을 만든다. 


사랑과 선(line)의 관계를 생각해볼 때, 혹자는 그리스 신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일화가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에서 실타래는 미궁과 나라에서 탈출하도록 도와주는 매개체가 되는데, 사랑과 회화작업의 유사성 은 이 일화처럼 해결에 방점이 찍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분명하고 모호한 존재도 아니다. 오히려 분명한 이야기를 해주는 모호한 존재라 할 수 있다. 회화에서 선이 붓질, 그러니까 한때 있던 이와 그가 한 행위의 흔적을 담을 뿐만 아니라 그 존재가 물감, 캔버스, 더 나아가 작품이라는 다른 존재를 만나는 일이 된다. 그리고 다시 작품이 관객의 다른 시선을 잠깐 만난다는 것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선은 해결책이 아니라 다른 곳/것을, 서로 이어주면서도 놓아둔다. 내가 원하는 대상을 똑같이 닮을 수 없지만, 그러면서도 끌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것 사이에 교차가 이뤄진다. 붓질의 몸짓에 의해 남은 물질, 즉 재료도 지나간다. 붓질, 선을 그리는 일은 화면 위에서 물감이 덮이고 밀어내고를 반복하여 그 결과 어렴풋이 남는 선들이 교차하는 공간이 된다. 지나간다는 것은 무언가가 단순히 사라지거나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교차, 즉 마주함을 동반한다.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물질이, 물질과 물질이 잠시 만나는 순간을 담는 정태적인 곳이 《지나간 빛들의 에필로그》이다. 


마주함은 한순간에 그치는 허무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작품으로하여금 그 순간에 대립하거나 상반되는 것까지 껴안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로써 분명해졌다. 회화[타블로]는 이야기이다. 회화는 회화 나름대로 더할 것 없이 능숙하게 우화를 말한다.” 마르크 샤갈의 동판화를 보고 말한 가스통 바슐라르의 「빛의 근원」이라는 글에서 사실 강조되는 점은 ‘더할 것 없이’가 아니다. 글의 끝부분에서 그는 살아 있는 것과 생명력이 없는 것이 손을 서로 잡는 일에 대해 언급한다. 오히려 ‘더하는 것’, 즉 무언가에 무언가가 더해지고 만나는 것이 마줌함에 전제된다. 이는 곧 “무한함에 대해 이야기할 때 유한한 것을 제시한다”라고 쓴 타르콥스키의 말의 방점을 ‘이야기할 때’에 표시하게 된다. 두 글의 한 교차점에서, 우리는 물질인 회화는 ‘더하고 만나는’ 일을 통해서 순간적인 생명력을 ‘분명하게’ 이야기한다는 이해로 도달한다. 


모든 것들은 그 서사가 어떻게 쓰이든 간에 에필로그를 향한다. 무언가를 잠시 만나는 일을 목격하는 곳으로써의 에필로그. 그의 회화가 회화로서 머무르며 실제적인 접촉 없이 상호작용을 가능케 한다면, 그것은 순간적인 만남을 오래, 그러나 접촉할 수 없음에 함유하기 때문이다. 그 작품은 피부도 아닐 뿐만 아니라 휴대폰 모니터도 아니다. 그런데도 사랑을 이야기한다. 회화 물질에 비물질적인 개념을 보이고 차가움에 온기를 담는, 이 상반된 것들이 서로 접촉하며 손잡는 곳이다. 이곳에서 들리는 이야기, 사랑을 우리가 이야기할 때 떠올리는 그 어렴풋함과 확실하고 진지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unbending flash #5 (focusing on love)_140 x 140cm_Acrylic on Canvas_2023


 unbending flash #6 (focusing on love)_50 x 50cm_Acrylic on Canvas_2023


 unbending flash #7 (focusing on love)_50 x 50cm_Acrylic on Canvas_2023


 unbending flash #8 (focusing on love)_50 x 50cm_Acrylic on Canvas_2023


 unbending flash #4 (focusing on love)_45.5 x 38cm_Acrylic on Canvas_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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