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7 ~ 2023.11.12

조완준 : OVER EASY

#OVEREASY#오버이지#painting#페인팅#조완준작가#개인전#갤러리인

  • 작가

    조완준

  • 전시장소

    갤러리인

  • 휴관일

    월요일/화요일

  • 문의

    01090172016

  • 주소

    서대문구 홍제천로 116 201호

전시소개/

내가 아는 완준은 집안일과 요리를 좋아하고, 곧잘 하는 사람이다. 집에 초대받아 두어 번 관찰한 바로는 집에 이것저것 늘어놓긴 해도 집안일에 열심이고, 혼자서도 자주 뭔가를 해 먹으면서도 집에 꽤 자주 손님을 초대해서 괜찮은 요리를 대접하곤 한다. 어질러진 주방 위에서 분주히 움직인다. 앤초비 페이스트, 룸모 파스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는 신선한 브로콜리 같은 것들로. 


*그의 요리 계정은 @immaturekitchen 이라는 이름으로, 드로잉과 함께 요리 사진을 올리곤 하는데, 그것을 보면 조완준이 대체로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집안일은 각자가 가질 수 있는 실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완준은 집안일- 즉 실내의 일이 부끄럽다고도 했으나, 위에서 이야기했듯 내가 보기에 그는 퍽 집안일을 좋아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집안일의 범위를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로, 대략 이런 것들로 둔다면 말이다- 구석에 케케묵은 먼지를 닦기, 이틀 전에 먹은 설거지거리를 놔두기, 누군가를 초대하기 이전에 급하게 청소하기,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 등. 실내에서 우리는 타인에게 비추어질 자신에 대한 근심을 약간은 덜고 분주한 존재 증명을 잠시 쉰다. 실내에서는 내가 무엇을 했든, 무엇이든 상관이 없도록 미성숙한 자신을 내버려둘 수 있다. 있는 그대로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있는 그대로 우리는 실내에 있다. 실내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증명에 애쓰지 않아도 되며, 가상과 진실 사이를 엄격히 구분하지 않아도 된다. 허용된 채 그저 존재하고 있는 방식으로 있어도 된다.


*


사람들이 하얀색 커다란 접시를 들고 줄을 서서 갓 조리된 윤기나는 계란 후라이를 받는다. 직원이 계속 계란을 팬에 깨뜨리고, 그 앞에 집게에 집힌 종이에 [써니 사이드 업]이라고 적혀 있다. 하얀 흰자 위에 햇살처럼 떠 있는 노른자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써니 사이드 업이라고 불려진 계란후라이는 매끈한 표면을 유지하고 있다. 그걸 한번 더 뒤집어서 예쁜 면을 마저 익혀 먹기 쉽게 만들면 그걸 [오버 이지]라고 한다. 기름을 후라이팬에 두르고 서니 사이드 업을 만든 다음 다시 뒤집어서 오버 이지로 만드는 행위는 약간 우습기도 하다. 일부러 어설프게 보이게 매끈하고 윤기가 흘렀던 표면을 익히는 행위.


조완준의 그림은 그렇다. 능숙하지 않아 보이는 붓의 행위들을 통해 능숙하지 않은 눈으로 어디선가 캡쳐한 것들이 회화를 매개로 눈 앞에 놓여있다. 그것들은 날렵하거나 날카롭지는 않고, 면밀하고 시간을 들인 관찰로 재현하여 그리려는 시도는 전혀 아니다. 오히려 앞에 놓여진 것을 통해, 어설픔 자체를 그려내는 것에 가깝다. 

무엇에 어설프다는 것은 원하는 대로 정확히 통제가 불가능한 채, 의지와 상관 없이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을 주로 가리킨다. 정확한 타이밍에 초점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 카메라 앞의 대상을 담지 못한다거나, 요리에 실패해 원하던 싱그러운 색이 아닌 조금 까만 요리를 만들어 버린다거나, 그렇게 우리가 최초에 목표했던 것을 이루지 못하는 것 말이다. 어설프다. 조완준의 그림은 그런 어설픔 자체를 이야기한다. 

어설픔 자체를 이야기하는 태도와 더불어, 화면 안의 대상/이미지 또한 그 무엇도 가리키지도, 지칭하지도 못하며 빗겨나간다. 이때의 빗겨나감은 되려 성공적이다. 빗겨나감에 슬퍼하지 않는 이유는, 원래부터 그 대상/이미지가 무언가를 명확히 지칭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눈알에 잠깐 찍힌-캡쳐된 것들, 그것의 표면만 그대로 옮길 때 조완준이 바라는 바는, 무엇이 되지 못하는 것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완준은 이름-서사-역사 없음의 상태를 긍정하는 것에 가깝다. 화면 속 대상들은 마치 그린 스크린 앞에 찍히기를 기다리며 서 있는 사물들 혹은 풍경들처럼, 활기찬 실재성 같은 것은 버리고 저항 없이 있는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설명을 도와주고 있는 듯, 어쩌면 그럴듯한 서사를 하나 만들어낼 듯도 하지만 동시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도 하다. 어느 쪽일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은 서로에게 유능한 설명서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빗나가는 설명서이다. 


명확하게 구획하여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는, 그것에 그것의 속성 혹은 서사를 알리거나 만들어 붙여주는 행위다. 그렇다면 치약을 그렸다고 치약을 그리려고 한 것은 아닐 때, 우리는 그것을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화면의 대상은 분명 실재에 존재하는 무언가의 형상을 따 왔지만, 그것들은 모두 스스로 실재를 버린 채로 비어 있다. 그것이 가리키는 형상은 분명 익숙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마땅히 지칭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 그것은 그저 존재하며 있는다. 그럴 때에, 그것의 표면과 그 내부의 실재 사이 또한 경계가 흐려진다. 같은 맥락에서 가상인지, 진실인지에 대해 정확히 판단하는 것 또한 어려움을 겪는다. 가상과 진실 사이의 위계는 흐려져 동등해진다. 

조완준은 그러한 가상과 진실, 기표와 기의 사이의 간극, 이름과 그 대상 사이를 붙여내지 않아도 되는 자리를 만든다. 그는 그런 자리가 허용할 것들을 환영한다. 무거운 것은 가벼워지고 가벼운 것은 무거워져 무게는 무엇이 더 무겁거나 가벼울 것 없이 평등해지는 자리.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서 삑사리와 의미는 같은 것, 엇나감과 들어맞음은 같은 것이 된다. 실수와 의도된 것, 실수처럼 보이는 의도된 것, 의도되었지만 빗겨나가 실수가 된 것. 이 세 개의 사이에 차이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곳에선 성립되지 않은 말소리가 더 명확하게 귀에 꽂히고, 오타가 더 정확히 전달할 것이다. 

언제라도 도망칠 것 같은 표면과 속성들은 헛돌고 방황한다. 정확히 무엇이 되지 않는다. 말장난에 불과한 형상, 그리고 말장난 같은 속성, 혹은 말장난이 속성이 되며 모든 게 한번 더 뒤집힌다. 써니 사이드 업이 한번 뒤집혀져서 더 이상 써니 사이드 업이 아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일종의 계란 후라이인 오버 이지인 것처럼. 모든 것에 어떠한 층이 하나 더 생겼음에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층들은 애매한 한 덩어리가 되어버린다. 노른자가 약간 더 익어버리고, 흰자로 좀 더 뿌예진 형태. 조금 어정쩡하거나, 어설퍼진 계란인 무언가. 그 속엔 아직은 조금 흐물거리는 노른자가 있다.


*


어쩌면 조완준이 동경하는 지점은, 속성이 없는 것, 무엇이 실재인지 그것의 속성을 붙일 권위를 갖지 않아도 되는 것, 혹은 아직 의미화 되지 않은 것, 서사가 성립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즉, 아직 무엇이 되어도 상관이 없는 볼 보이*같은. 볼 보이는 동경하는 대상을 따라 볼만 줍고 있는, 아직 속성이 붙여지지 않은 미성숙한 상태이다. 볼 보이는 볼이나 줍다가 사실 볼 줍기는 쉽게 때려치고 한량처럼 살아도 된다. 혹은 갑자기 다른 길을 택해도 된다. 터무니없이 락스타를 꿈꿔도 된다. ‘~가 되고 싶어.’를 말할 수 있는 상태. 붙여진 의미가 없는 상태. 비어있지만 비어있는 상태로 긍정이 가능한 상태. 그것은 가장 불가능하다. 지속 불가능한 미성숙함과 어설픔과 가벼움이다. 조완준은 그 지점이 가장 불가능하기에 원해짐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이 계속 불가능하게 헛돌기를 놔둔다. 그리고, 권위 없는 채로 무언가를 파헤치고 정의하고 이름을 붙이는 행위 자체를 하지 않기로- 불가능한 어설픔의 지속을 불가능한채로 지속하기로- 결정한 것에서 만족한다. 그 결정이 전혀 쓸모 있는 것이지 않다는 점에서 그것은 매우 쓸모가 있다. 

*볼 보이ball boy : 조완준이 만든 이미지 수집 북의 이름. 그의 책과 그림에서 볼 보이라는 소재가 자주 등장한다.


조완준의 집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둘러 앉아 있는 것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그의 테이블에 앉아 그런 권위 없는, 이름을 붙이길 그만두기로 한 결정들을 바라보며 우리가 모두 쓸모없음을, 동시에 이름없음을 생산하고 있음을 즐거워한다. 우리가 모두 일종의 정크 생산자들임을 잊지 않는 차원에서 우정을 나누는 일은 꽤 즐겁다. 이제는 잔여물과 부산물만 생산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린 동시대에서 우리는 동일한 상태를 감각하고 다르게 그린다. 바라보는 역사와 물건은 너무 많고 진실이라고 주장되는 것과 가짜인 것도 너무 많다. 어쩌면 모두 비슷한 것들을 쳐다보고 묘사하려 애쓰고 있다. 저 너무 가득 차고 텅 비어있는 쓰레기 산. 너무 가득 차고 텅 비어있어서 어쩌면 진짜인지 아닌지 그것도 잘은 모르겠다.  


그것이 더 이상 진짜인지 아닌지를 가려내기보단, 같은 정크를 쳐다보고 그리고 묘사하면서 최대한 웃겨 보이길 빈다. 의미나 해석의 과잉 상태에서 우리가 볼 보이보다 조금 더 시선을 사로잡는 락스타로 자리잡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최대한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 상태에서 실소를 터트리게 하는 조크들일지 모른다. 우리는 더 자연스러워 보이게 실소를 조장하고 그 부자연스럽게 자연스러운 실소들은 때로 지나치게 친근하고 어색하다. 결국 입술 밖으로 비죽 비져나오는 작은 웃음소리 밖에는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것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어설프게 웃기기.

 

 Untitled (bulding), 91 ×130.3, acrylic on canvas, 2023


 Untitled, Oil on linen, 40.9×53 cm, 2023


 Untitled, Acrylic on canvas, 37.8×45.5 cm, 2023


 Untitled, Acrylic on canvas, 45.5×52.8 cm, 2023


 Untitled, Acrylic on canvas, 33.4×45.5 cm, 2023
 

작가약력/ 

2021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전문사 재학

2018 홍익대학교 회화과, 불어불문학과 학사 졸업



SNS/

인스타그램 @1x2o_/ @_innsi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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